사진 속의 남자는 참 다양하게 불렸습니다. 가수 김민기. 학전 대표 김민기. 김민기 선생님. 김민기 씨. 뒷것 김민기.... 그의 이름을 님도 들어보신 적 있지 않을까요? 최근 그의 부고 소식이 온 미디어를 가득 채웠으니까요. 그러나 살아생전 그는 자신의 이름을 언제나 한 걸음 뒤로 물려놓았습니다. 대중 앞에, 카메라 앞에 적극 나서지 않던 그가 스스로를 ‘뒷것’이라 칭한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대신 자유롭게 노래를 부르고 몸짓하는 수많은 예술가들을 ‘앞것’이라 부르며 자신이 쓴 글과 선율을 양분처럼 나눠주었습니다. 그 양분들은 계속해서 다음 세대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작사/작곡 김민기’ 혹은 ‘원작 김민기’ 옆에 새로운 우리들의 이름을 적어놓고 있으니까요.
[이것도 민중가요?]의 이번 호에서는 계속 들려오는 ‘김민기’의 삶과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또한 이 편지는 우리 곁을 떠났으나 언제나 우리 곁을 함께 할 그에게도 가닿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삶이 고단할 때마다 <상록수>는 들려왔습니다. 가장 최근 <상록수>가 들려온 때는 2020년 코로나 바이러스를 전세계가 앓고 있었을 때였죠. ‘합창’으로 편곡되어 돌아온 <상록수>는 그 제목처럼 긴 수명을 지닌 듯했습니다. 또한 그 가삿말처럼 고난과 인내의 시간이 새겨져 있는 듯합니다. <상록수>는 70~80년대 학생운동의 대표곡으로, 그 유명한 <아침 이슬>과 함께 금지곡이 되었고, 해금 이후에는 IMF 시절 공익광고(박세리 출연)[참조]로 새롭게 기억되기도 했으니까요.
그래서인지 <상록수>가 공장 노동자들의 합동결혼식 축가였다는 사실은 의외임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다가옵니다. 결혼식일 수도 있고 집회 현장일 수도 있는 저마다의 삶의 현장에서 <상록수>를 떠올린 이유가 이해됩니다.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고, 비바람 맞고 눈보라 쳐도 온누리 끝까지 맘껏 푸른 상록수가 우리들의 이정표가 되어주었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양희은 씨는 <상록수>를 통해 ‘노래의 생명선’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습니다. [보기] 노래란 작곡가-가수-청중으로 이어지고 반복되며 “굴절에 굴절을 거쳐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질지 그 누구도 점칠 수 없다”고 말입니다. 그런 굴절 속에서도 <상록수>에서 변하지 않는, 변하지 않을 게 하나 있다면 마지막 가삿말의 의미이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 /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2. 김민기 - 〈식구생각〉
이 노래의 가사에는 과거 억압적인 한국 사회가 바탕하고 있습니다. 1951년 생인 김민기의 유년시절이 배경일지도 모릅니다. “송아지는 왜 판담 그 까짓 학교 대순가 뭐 / 들판엔 꼬마애들 놀고 있는데 / 나도 나가서 뛰어놀까 구구단이나 외울까 말까”.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 밭일 하던 소를 팔고는 했던 옛날이 떠오릅니다. 가사 속 투덜대던 아이는 어느새 장성하여, ‘학전’이라는 극단을 꾸리는 데 벌어들인 음원 수입을 모두 쏟아부었습니다. 학전은 배울 학(學)에 밭 전(田)으로 말 그대로 예술가들을 위한 ‘배움의 밭’이 되었습니다.
이름만 대면 바로 알 수 있는, 이름을 모르더라도 얼굴만 보면 “아 그 사람” 하고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는 예술가들이 이곳에서 기초를 다졌고, 900여 명의 예술가들이 학전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참조] 그야말로 예술인들을 위한 ‘못자리’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학전은 아이러니하게도 재정난에 시달렸습니다. 연극이 흥행하지 않더라도 그는 단원들에게 최소 개런티를 지급했고, 풍족하지 않은 아이들의 문화예술의 장을 지키기 위해 “절대 아동극 푯값은 올리지 마라”고 했으니까요. 어느 순간에는 자신의 집을 담보로 학전 식구들의 급여를 지급하기도 했습니다. 모두가 만류했음에도 말이죠. 그렇게 그 한 몸 거름으로 뿌린 땅에 꿈들이 매년 자라나 결실을 맺어왔습니다.
식구가 많았던 그였고, 그래서 생각이 많았던 그였기에 이 노래를 소개해드립니다. 해질녘 태양처럼 그가 지고난 뒤에도 그의 말은 계속 들려옵니다. 자신의 학전 운영 원칙과 관련한 말이었습니다. “계산이 안 맞지.” “그럼에도 어느 한 구석에서는 그걸 지키고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할 것 같아요. 돈이 안 되더라도.”
3. 김민기 - 〈아침이슬〉
이 노래를 꼽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국의 ‘민중가요’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노래일 테니까요. 그러나, 어쩌면 ‘그래서’라고 해야 할까요? 정작 그는 <아침 이슬>은커녕 어느 순간부터 노래를 부르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전에 SBS에서 방영된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2024)에서 <아침 이슬>을 두고 한 그의 말이 기억납니다. 1987년 이한열 추모식에 그도 그 자리에 있었다며, 장송곡으로 음울하게 울려퍼지던 자신의 노래를 두고 한 말이었습니다. “그 순간엔 그 노래는 그 사람들 것이긴 하죠.”
‘그래서’라고 해야 할지, ‘그러나’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공연 이후로 그는 <아침 이슬>은커녕 어느 순간부터 노래를 부르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전에 SBS에서 방영된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2024)에서 <아침 이슬>을 두고 한 그의 말이 기억납니다. 그도 1987년 이한열 추모식 자리에 있었다며, 장송곡으로 음울하게 울려퍼지던 자신의 노래를 두고 한 말이었습니다. “그 순간엔 그 노래는 그 사람들 것이긴 하죠.”
그는 받기보다 주는 게 더 많던 사람으로 보입니다. 정부의 감시 속에서도 야학을 하는 노동자들을 위해 교사를 했고, 수익을 바라지 않는 아동극을 계속 올렸고, 누군가가 지원해주겠다고 하면 손사래를 쳤으니까요. 그런 그가 다른 이들로부터 무언가를 받은 몇 안 되는 순간 중 하나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학전’의 대표적인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의 원작자인 ‘폴커 루트비히’가 그에게 단원들과 함께 <아침 이슬>을 독일어로 들려주던 때입니다. (보기/13분 23초) 자료화면 속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그 감정이 어떤 것일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문득 떠오른 두 마음. ‘미안함’, ‘고마움’. ‘학전’의 마지막 공연을 통해 그는 <아침 이슬>을 주고 떠났지만 우리는 <아침 이슬>을 이어받음으로써 그를 보내주었습니다. [참조] 그와 같은 우리들의 마음이 가닿았길 바랄 뿐입니다.